산악신앙의 다른 말은 산신숭배다. 산신숭배는 상고시대부터 세계 어느 곳에서나 있어 왔던 제례의식이다. 한반도에서도 예외 아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첫 작업이 산신숭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 기록이 제사조에 고스란히 나온다. 신라는 삼산(三山) 오악(五嶽) 이하 전국 명산대천에 지내는 제사를 대사·중사·소사로 나눴다. 대사 삼산은 경주 주변에 있는 나력, 골화, 혈례산으로 수도 서라벌을 방어하기 위한 호국신의 성격이 강했다. 중사는 오악 이하 사진(四鎭)·사해(四海)·사독(四瀆), 그리고 ‘기타’로 구분
무등산만큼 하나의 산에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산도 드물다. 무등산, 무돌, 무당산, 무정산, 무진악, 무악, 무덤산, 서석산 등이 전부 무등산을 가리킨다. 어떻게 이런 다양한 지명을 가지게 됐을까? 이름은 모두 사연과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전부 설명하려면 책 한 권쯤 써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산신과 관련한 부분만 간단히 살펴보자. 산신은 역사서에도 나오지만 필히 설화나 전설과 같이 등장한다. 역시 조선 왕조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전국의 명산을 다니며 두루 산신기도를 올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
피은 제8 낭지승운 보현수(朗智乘雲 普賢樹)조에 영축산이란 지명과 영축산 산신이 역사적으로 처음 등장한다. 역사서에 기록된 전설 같은 이야기다.‘영축산(靈鷲山)에 이상한 승려가 있었다. 지통이라는 상좌승이 있었는데, 까마귀가 와서 울며 말했다. “영축산으로 가서 낭지의 제자가 되라.” 지통은 그 말을 듣고 이 산을 찾아가 골의 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말했다. “나는 보현대사인데, 너에게 계품(戒品)을 주려고 한다.” 이에 계를 주고 나자 그는 사라졌다. 그러자 지
남해 금산, 한국 최고의 기도처로 꼽힌다. 한국의 3대 기도처라 하면 남해 금산 보리암,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낙가산 보문암이다. 여수 향일암을 포함해서 4대 기도처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으뜸 기도처가 남해 금산 보리암이다. 이들은 모두 해수관음 기도 도량이다. 산신 기도처로서는 설악산 봉정암과 팔공산 갓바위 기도처를 으뜸으로 꼽는다. 때로는 영축산 통도사 자장암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산신 기도처와 해수관음 기도처를 총망라해서 꼽는 한국 최고의 기도처는 금산 보리암과 설악산 봉정암, 팔공산 갓바위라 한다. 해수관음이든 산신
대구 팔공산은 신라 삼산오악 중 중악이다. 오악은 통일신라가 각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을 지정해서 국가적인 제사를 왕이 직접 주관해서 지내던 곳이다. 신라는 통일 전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삼산과 왕경오악이라는 형태로 산악숭배신앙을 가졌다. 통일 이후 신문왕대에 이르러 중국의 호국신의 개념인 오악까지 수용, 삼산오악제도를 국가체제로 정비한다. 와 에 이같은 기록이 그대로 전한다. 산악숭배신앙이 바로 산신으로 나타나는 호국신이며, 산신에게 지내던 산신제는 아직까지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매년 3월 12일 전후해서 열
모악산을 흔히 ‘어머니의 산’, ‘영적인 산’이라 한다. 어떤 사람은 모악산을 한국 ‘미륵신앙의 메카’라고도 부른다. 미륵의 산, 어머니의 산, 영적인 산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후천개벽의 주체라는 점이다. 그러면 후천개벽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악산 산신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먼저 미륵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산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미륵신앙은 석가모니불 제자 중의 한 명이 미륵에게 장차 성불해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을 근거로 부처님 사후 미륵의 세상이 온다는 데서 유래했다. 이를 토대로
최영 장군은 한국 최고의 장군신으로 통한다. 민간에서는 수호신·마을신으로, 샤머니즘에서는 장군신으로 모시는 동시에 매년 산신제를 지내는 대상으로 좌정돼 있다. 현재 장군신으로는 임경업, 남이, 관우 등과 같은 뛰어난 장군이 있지만 최영 장군은 그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영험하다는 소문이 전한다. 샤먼들 사이에서는 억울한 죽음이 부른 ‘원한(怨恨)의 강도’가 신통력을 결정한다고 한다. 특히 그의 훌륭한 업적에 반해 억울한 죽임을 당했을 경우엔 서민들의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시대를 넘어 전승된다. 원한에 대한 반대급부로 서민과 영웅신으로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산신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산신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산신의 보편성과 일반성 측면에서 김유신 장군이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이 전혀 연고가 없을 것 같은 강릉 대관령의 산신이 됐다 하면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다. 산신의 지역성과 특수성 측면에서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법하다. 그가 왜, 어떻게 대관령산신이 됐을까? 그는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 사망한다. 그런데 그가 언제 대관령산신으로 좌정했을까? 대관령 주민들이 어떻게 그를 무
산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산과 문화’ 강좌가 ‘산과 문화를 논하다’라는 주제로 마침내 개강했다. 지난 8월 25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회관에서 엄홍길 대장이 ‘산악인 엄홍길 대장이 말하는 산’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총 13주차 과정의 첫 출발을 알렸다.사실 5,000여 년 전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신화부터 산에서 시작하고, 산을 찾는 등산객이 월 1,800만 명을 넘어선 지금, 한국인들의 산사랑은 유별나지만 그에 대한 연구와 강좌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이에 월간이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와 공동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전통 신앙인 산신(山神)숭배를 적절히 이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역사적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대사·중사·소사에 따른 삼산오악제도다. 삼산오악제도를 실시한 시기는 대체적으로 문무왕(재위 661~681년)대로 보고 있으나 일부는 신문왕(재위 681~692년)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삼산오악제도는 고려에 이어 조선까지 유사한 제도로 계승되고, 현재까지도 대부분 명산·명소로 거론되는 장소들이다. 권32 잡지 제사편에 ‘
계룡산 산신은 누구일까? 남성일까, 여성일까? 통일신라시대의 오악인 지리산은 구체적인 산신의 실체가 드러나는데, 같은 오악이었던 계룡산에는 왜 나타나지 않을까? 계룡산 산신은 언제부터 유래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계룡산 일대를 샅샅이 훑고 다녔다. 산신이나 계룡산 관련 전문가라는 전문가는 모두 찾아서 만났다. 산신의 실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알 수 없었다.하지만 매우 중요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전에 소개한 산신과는 또 다른 산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소득이었다. 이른바 ‘산신의 원형’성에 관한 내용이
1653년(조선 효종 4) 제주 목사 이원진이 과 을 참고해서 편찬한 에 한라산을 소개한 글이 있다.‘한라산은 제주도 중앙에 흘립(屹立: 우뚝 솟은)한 해발 1,950m의 고산이라. 한라라 운(云)함은 운한(雲漢)을 가(可)히 라인(拏引: 붙잡아 끌어당김)할 수 있다는 숭고한 그 웅자(雄姿)를 표현하는 형용사이요. 일(一)은 두무악(頭無岳)이라 칭하니, 봉봉(峰峰)이 다 요함(凹陷:오목하게 들어감)한다는 것이요. 일(一)은 원산(圓山)이라 칭하니, 산형이 궁(穹)하고 원(圓)하다는 것이요. 일(一
고대사회의 도시 형성은 반드시 산과 강(=물)을 끼고 있어야 한다. 외침을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산과 거주하는 데 필수품인 물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다. 여기에 정착생활을 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가 있다면 완벽한 지형조건이다.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는 이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다. 더욱이 3개의 하천과 강이 자주 범람하면서 형성된 평야는 그야말로 옥토였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사람 살 만한 땅이었다.드넓은 평야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풍부했다. 부락이 생겨났다. 각각의 성씨가 부락을 대표했다. 6개의 성씨가 시조가 된 부락이며,
산악신앙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를 비롯한 많은 고대 문헌에 나타난 산악신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사상이다. 고대 국가들은 산에서 제사를 지내며 나라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고, 통치권자의 정당성을 부여받기도 했다.조선총독부가 1940년쯤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지는 ‘부락제(祭)’를 조사한 마지막 기록으로 산신제 176, 동제 126, 서낭제 99, 여신제 20, 부군제 11개 등 도합 432개로 집계됐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는 민속신앙에 대해서 정확한 통계가 나온 적이
가야산은 고대 가야국의 진산이다.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고대국가는 국가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 국가의 통치자와 겸했다. 따라서 국가를 건국한 왕은 신격화된 건국신화가 반드시 뒤따랐다. 하늘로부터 받은 왕권을 더욱 신성시하고 통치권을 공고히 다지는 차원에서라도 신화적으로 만들었다. 왕을 낳은 부모부터 왕까지 신과 관련된 이야기로 각색됐다. 어디까지가 역사이고, 어디까지 신화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든 고대국가들이 그렇듯이 가야도 당연히 건국신화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가야에는 두 가지 건
(1145년쯤 김부식이 발간한 현존 최고의 역사서)와 (1281년쯤 승려 일연에 의해 발간)에 이어 이승휴의 (1287년 발간)에서도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용왕이 다시 나와 사례하며 깊은 궁궐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와서 맏딸을 아내로 삼거늘, 금털 난 돼지와 칠보를 겸하여 주기를 비니, 이에 서강 물가로 실어 보냈다. 돌아와 송악에서 살았는데, 여기에서 성지를 낳았다. 성모(聖母)가 도선 선사에게 명하여, 이를 가리켜 명당이라 말하게 했다’-이승휴 ‘
한국의 산에는 신(神)이 있다. 어떤 신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종교전문가와 무속인들은 “한국의 모든 봉우리마다 산신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언제부터 신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역시 없다. 역사적으로 대충 추정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신은 고대사회에서 자연신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던 고대사회는 천둥·번개·폭풍우 같은 자연현상, 그리고 해와 달·별 같은 자연의 신비스런 순환 하나하나에 전부 위압감을 느끼고, 이들에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인들은 이들에 각각 제사를 지냄으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재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산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할 전망이다. 명산문화연구센터가 한국에서 처음 창립됐다. 일종의 학문으로서 ‘산학(山學)’을 체계화하기 위한 토대를 다진다는 계획으로 야심차게 출발했다. 초대 센터장은 경상대 최원석 교수가 맡았다. 최 교수는 풍수학자 최창조 선생의 직속 후배로, 서울대 지리학과 학·석사를 졸업하고, 고려대에서 비보풍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창립기념 학술심포지엄이 11월 6일 진주 경상대에서 개최됐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최 교수가 ‘한국 산 연구의 전망과 학적 대상 시론’을
가장 영험하기로 소문난 지리산 산신에 관한 고찰에 이어 이번 호에서는 산봉우리에 존재한다는 여자 산신령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산신령의 성별(性別)에 대한 쟁점은 단순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어서 20여 년간 계속되어온 나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의문점은 풀리지 않았다. 지리산은 둥그렇게 둘러싸인 형세의 영향으로 지기(地氣)의 음(陰)에 해당하는 산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설악산은 바위가 많아 험준하고 굳센 형상을 띤 양(陽)의 산이다.그러나 산의 형세가 산신의 성별을 구분 짓는 건 아니다. 계룡산의 경우만 보더라
한국의 산신에 대한 전통이 영속적인 고대 문화의 핵심이었고,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력하게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난 달에 이미 살펴봤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산신 탱화와 동상들은 더욱 더 커지고, 상세하면서 복잡해지며, 더 화려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등산객들에게는 더 많은 지역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산신숭배에 관한 공식적 인정과 지원은 정부 차원에서보다는 대부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문화와 관광을 촉진하기 위해 책임을 진 정부 관리들과 공립공원과 휴양림과 같은 산